조선시대 생활사 퀴즈 12문제 - 문과·무과·잡과와 전시, 양반 중인 상민 천민, 노비 세습과 1801년 공노비 해방, 호패, 암행어사 마패, 상평통보, 장시와 보부상, 향교와 서원, 태장도유사 오형, 균역법, 서당

왕과 전쟁 말고,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규칙 안에서 살았는지를 묻는 문제만 12개 골랐습니다.

총 12문제, 약 3분 소요. 시기에 따라 제도가 달라진 부분은 빼고 조선 전체에 걸쳐 통용된 내용 위주로 다뤘습니다. 결과 아래 안내에 전체 정답과 해설이 있습니다.

정답과 해설

  1. 조선의 과거 시험 가운데 "잡과"에서 뽑은 사람은? — 정답: 통역, 의술, 법률, 천문 같은 전문 기술을 다루는 관리. 과거는 크게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었습니다. 문과는 글을 다루는 문관을, 무과는 무관을 뽑았고, 잡과는 전문 기술직을 뽑는 시험이었습니다. 통역을 맡는 역과, 의술의 의과, 법률의 율과, 천문과 지리를 다루는 음양과가 여기 속합니다. 합격하면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가 됐지만 승진에는 한계가 있어, 이들이 중인 계층의 중심을 이뤘습니다.
  2. 문과의 마지막 단계인 "전시(殿試)"에서 하는 일로 맞는 것은? — 정답: 앞선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왕 앞에서 등수를 매기는 것. 문과는 초시에서 지역별로 거르고, 복시에서 최종 합격자를 가린 뒤, 전시에서 등수를 정하는 구조였습니다. 전시는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치러졌고 여기서 떨어뜨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복시를 통과한 시점에 사실상 합격이 확정됐습니다. 최종 합격 정원은 33명이었고, 1등을 장원이라 불렀습니다. 문과에 앞서 생원과 진사를 뽑는 소과가 따로 있었습니다.
  3. 조선의 신분 구분에서 "중인"에 해당하는 사람은? — 정답: 역관과 의관 같은 기술직 관리, 중앙과 지방 관청의 실무를 맡은 서리와 향리. 중인은 양반과 상민 사이에 놓인 계층으로, 잡과를 거친 역관·의관·율관 같은 기술직과 관청의 실무를 처리한 서리, 지방 행정을 맡은 향리 등이 속했습니다. 양반의 첩에게서 난 서얼도 대체로 이 층에 묶였습니다. 전문 능력으로 실무를 쥐고 있어 재산을 모은 이들도 있었지만, 오를 수 있는 품계에 벽이 있어 고위직으로는 나아가기 어려웠습니다.
  4. 조선의 노비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 정답: 신분이 자손에게 세습됐고, 1801년에 중앙 관청에 속한 공노비 상당수가 해방됐다. 노비는 신분이 자손에게 이어졌고 재산처럼 사고팔거나 물려주는 대상이었습니다. 부모 중 한쪽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로 삼는 원칙이 오래 적용됐고, 시기에 따라 어머니 쪽을 따르게 하는 종모법이 시행되기도 했습니다. 1801년 순조 때 중앙 관청에 속한 공노비 수만 명의 노비 문서를 불태워 이들을 풀어 줬지만, 개인이 거느린 사노비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신분제 자체는 1894년 갑오개혁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됩니다.
  5. 호패(號牌)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 정답: 일정 나이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니던 패로, 이름과 신분 등을 적어 신원을 확인하는 데 썼다. 호패는 열여섯 살 이상의 남자가 지니고 다니던 일종의 신분증으로, 이름과 태어난 해, 신분 등을 새겼습니다. 신분에 따라 상아, 뿔, 나무처럼 재료가 달랐습니다. 나라가 이것을 시행한 목적은 인구를 파악해 세금과 군역, 부역을 매기는 데 있었고, 그래서 백성 쪽에서는 피하려는 움직임도 만만치 않아 제도가 시행과 중단을 반복했습니다.
  6. 암행어사가 지니고 다닌 마패는 원래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 정답: 공무로 이동할 때 역에서 말을 내주도록 하는 증표. 마패는 공무로 다니는 관리가 역참에서 말을 징발할 수 있게 해 주는 증표입니다. 새겨진 말의 마릿수만큼 말을 받을 수 있었고, 지위와 임무에 따라 마릿수가 달랐습니다. 암행어사가 신분을 밝힐 때 이것을 내보였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어사의 상징처럼 알려졌지만, 원래 용도는 교통 증표에 가깝습니다. 어사가 함께 받은 물품으로는 놋쇠 자인 유척도 있었는데, 도량형을 속이는지 재 보는 데 썼습니다.
  7. 상평통보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 정답: 조선 후기에 나라의 화폐로 채택돼 전국에서 널리 쓰인 둥근 동전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쌀과 무명 같은 현물이 사실상 돈 노릇을 했고, 앞서 발행한 동전들은 널리 퍼지지 못했습니다. 17세기 후반 숙종 때 상평통보를 다시 찍어 유통을 밀어붙이면서 비로소 전국에서 통용되는 화폐가 자리 잡았습니다. 가운데 네모난 구멍은 끈으로 꿰어 묶기 위한 것입니다. 화폐가 돌자 상업이 커졌지만, 동전을 쌓아 두는 사람이 늘어 시중에 돈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8. 조선 후기 장시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던 보부상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 정답: 보상은 값나가는 잡화를 보자기에 싸서 지고, 부상은 부피가 큰 물건을 지게에 얹어 날랐다. 보부상은 봇짐장수인 보상과 등짐장수인 부상을 함께 이르는 말입니다. 보상은 비녀나 실 같은 부피가 작고 값이 나가는 물건을 보자기에 싸서 다녔고, 부상은 소금이나 그릇처럼 크고 무거운 물건을 지게로 날랐습니다. 닷새마다 서는 장시가 지역마다 날짜를 엇갈려 열렸기 때문에, 이들이 장을 옮겨 다니며 지역과 지역을 잇는 유통망 노릇을 했습니다.
  9. 조선의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의 차이로 맞는 것은? — 정답: 향교는 나라가 고을마다 세운 관립 학교이고, 서원은 지방 사림이 세운 사립 학교다. 향교는 나라가 지방 고을마다 세운 관립 교육기관으로,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학생을 가르치는 두 가지 기능을 함께 맡았습니다. 서원은 지방 사림이 세운 사립 기관으로, 존경하는 선현을 모시고 후학을 기르는 곳이었습니다. 최초의 서원은 중종 때 세운 백운동서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원은 학문의 중심이 되는 한편 붕당의 근거지가 되기도 해, 조선 말 흥선대원군 때 대부분 정리됐습니다.
  10. 조선의 다섯 가지 형벌(오형)을 가벼운 것부터 무거운 순으로 바르게 늘어놓은 것은? — 정답: 태 → 장 → 도 → 유 → 사. 조선은 중국의 형률을 받아들여 다섯 등급의 형벌을 두었습니다. 태는 작은 회초리로, 장은 그보다 굵은 몽둥이로 볼기를 치는 벌이고, 도는 일정 기간 노역을 시키는 벌, 유는 먼 곳으로 보내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유배, 사는 사형입니다. 유배는 거리에 따라 등급이 갈렸고, 죄인이 머무는 곳에 가시울타리를 둘러 바깥출입을 막는 위리안치 같은 형태도 있었습니다.
  11. 영조 때 시행한 균역법이 줄여 준 부담은? — 정답: 군역 대신 내던 군포를 한 사람당 2필에서 1필로 줄였다. 군역에 나가지 않는 대신 베를 내는 것이 군포였는데, 부담이 무거운 데다 양반이 빠져나가면서 상민에게 쏠렸습니다. 영조는 이를 한 사람당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시행했습니다. 대신 줄어든 재정은 토지에 별도로 매긴 결작, 지방의 여유 있는 층에게 매긴 선무군관포, 어업과 소금에 매기는 세금 등으로 메웠습니다. 부담을 덜어 준 조치였지만 군역이 상민에게 쏠리는 구조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12. 조선의 서당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 정답: 마을 단위의 초급 교육기관으로, 훈장이 천자문 같은 기초 한문부터 가르쳤다. 서당은 마을 단위로 열린 초급 교육기관으로, 훈장이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같은 기초 한문부터 가르쳤습니다. 나라가 세운 것이 아니라 마을이나 뜻있는 개인이 열었기 때문에 규모와 형편이 제각각이었고, 상민의 자제가 다니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기초를 닦은 뒤 향교나 서원으로 나아가고, 그다음에 과거를 준비하는 것이 대체적인 경로였습니다.

시험이 신분을 정하고, 신분이 시험을 정한다

문과는 문관, 무과는 무관, 잡과는 통역과 의술 같은 기술직을 뽑았습니다. 잡과 출신이 이룬 층이 중인이고, 여기에 서리와 향리, 서얼이 함께 묶였습니다. 문과는 소과를 거쳐 초시와 복시로 합격자를 가린 뒤 전시에서 등수만 정했고, 최종 정원은 33명이었습니다.

부담은 결국 상민에게

조선의 세금은 토지에 매기는 것, 사람에게 매기는 군역, 특산물로 받는 공납으로 나뉩니다. 공납의 폐단을 손본 것이 토지 결수 기준으로 바꾼 대동법이고,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인 것이 균역법입니다. 둘 다 부담을 덜었지만 양반이 빠져나가는 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실학이 나온 자리

조선 후기에는 상평통보가 돌고 장시와 보부상이 유통을 넓히면서 사회가 빠르게 달라졌습니다. 이 변화를 보며 토지 제도와 상공업, 기술을 실제로 손봐야 한다고 주장한 흐름이 실학입니다. 농민의 토지 문제에 주목한 쪽과 상공업 진흥, 청의 문물 수용을 주장한 쪽으로 나뉘어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조선에서 신분은 정말 넷으로 딱 나뉘어 있었나요?

법으로는 자유민인 양인과 천인을 가르는 구분이 기본이었고, 양반·중인·상민·천민이라는 네 층은 실제 사회에서 굳어진 구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경계도 생각보다 유동적이어서, 조선 후기에는 재산을 모은 상민이 족보를 사들이거나 공명첩을 받아 양반 행세를 하는 일이 늘어 신분제가 안에서부터 흔들렸습니다.

전체 정답과 해설은 어디서 보나요?

결과 화면 아래 "정답과 해설" 안내에 12문제 전체의 정답과 항목별 설명이 문제 순서대로 정리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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